본문 바로가기

연재物 ^ 소설

면천(免賤) - 소설^토정비결(上-2)

벌써 절기로는 입춘이건만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도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심 대감 댁을 떠나올 때 하인들은 심 대감이 쓴 입춘방(立春榜)을
기둥마다 붙이고, 대문에도 붙이느라고 분주했었다.


<입춘대길(立春大吉)>, <수복(壽福)>.


이 모두 양반들이나 기원하고 누릴 수 있는 것,
종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가 종에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고, 이따금 몰래 숨어서 책을 읽는
정휴를 볼 때마다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덜너덜하게 해져 군데군데 속살이 내비치는
홑저고리 차림으로 정휴는 이웃마을 홍성현을 향해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오늘 아침,

길을 떠나려 하자 심 대감은 솜을 두둑히 넣은 깨끗한 겹옷 한 벌을 내주었다.

그러나
정휴는 새 옷은 괴나리 봇짐 속에 쑤셔넣고,

입고있던 차림 그대로 도망치듯 심 대감 댁을 빠져나왔다.
평소엔 입어 보지 못했던 겹옷을 입는다는 게 마음에
영 편편찮았기 때문이었다.
뛰다시피 걷고 있는데도 한기는 좀체 가시지
않았다. 아래윗니가 맞부딪치며 다닥거렸다.

그러나

추위보다 더 정휴의 몸을 움추러들게 하는 것은 암담하기만 한 앞날이었다.
어제 아침 식전 댓바람에 정휴는

주인인 심충익(沈忠翼) 대감의 부름을 받고 마당을 쓸다 말고 달려갔다.

비록 종과 주인의 관계였지만 심충익은 정휴의 유일한 스승이자 벗이기도 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정휴는 글읽기를 좋아했다.
심충익의 아들을 따라다니며 말동무를 해주다가,

등너머로 글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한두 자씩 익히게 된 정휴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에 일을 하다가도

연장을 내팽개친 채 마당 한 켠에 앉아 땅에다 글씨를 쓰고 있기 일쑤였다.
그러나 정휴의 어머니는 정휴가 글 읽는 것을끔찍이 싫어했다.

<천자문(千字文)>을 외울 때는
흐뭇한 눈으로 총명한 아들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통감(通鑑)>으로 <소학(小學)>으로 책을 올려잡자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급기야 글 읽는 것을
극구 말리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정휴가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않자

어머니는 아들이 글을 읽을 때마다 회초리를 들었다.
"종놈이 문자 배워 어디다 쓰겠느냐.

신세 망칠일밖에 없느니라.

사람이란 제 분수껏 살아야 하는 법이거늘.

너 하나 남아 있는 씨를 아예 말려버릴 작정이냐."
정휴의 나이 이제 열여덟.

그러나

그때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남아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매를 들던 어머니는 이미 저 세상으로 가고 없건만,

한바탕 매타작을 하고 난 밤이면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들려오던 어머니의 숨죽은 울음소리는 여전히 가슴속을 후벼 팠다.
어머니까지 말리던 공부를 주인 대감 심충익이
나서서 가르쳐주게 된 것은 정휴가 열셋 나던 해였다.
근 한 달이나 계속된 설 손님을 맞느라 밤잠을 못
자고 일하던 어머니가 급작스레 쓰러져 영영 세상을
저버리고 며칠 지난 뒤의 일이었다.
정월 보름은 아니지만 이월 보름달도 그에 못지않게 휘영청 밝았다.

어디선가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던 정휴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냉기 그득한 뜨락에 섰다.

달빛이 온 누리에 부서지듯 내리쏟아지고 있는 정정을 보고
있다가 정휴는 무심코 금강경(金剛經) 귀절을 외웠다.

 

무릇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凡所有相 범소유상)
허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皆是虛妄 개시허망)
이런 모든 현상이 다 거짓임을 깨우치면

(若見 諸相非相 약견제상비상)
그때 비로소 부처를 만나리라

(卽見如來 즉견여래)

그때였다.
"어느 하 세월에 네 녀석이 깨우친단 말이냐?

아주 제법이긴 하다만 종놈으로는 꿈이 너무 크구나."
농기 어린 나무람에 소스라치게 놀란 정휴가 뒤를
돌아보자 역시 달빛에 잠을 설쳐서 나온 것일까,
심충익이 단정한 의관을 하고 서 있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것이었다.
정휴는 얼른 허리를 구부려 예를 갖췄다.
"네 이름이 뭔고?"
"정휴입니다."
종놈의 입에서 가당치도 않은 시구절이
흘러나왔으니 불호령이라도 떨어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심충익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네 부모가 누군고?"
정휴의 말문이 콱 막혔다.

아버지의 얼굴은커녕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정휴였다.

어머니가 핏덩이인 자신을 안고 이 집의 종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그가 아는 이력의 전부였다.

철이 들면서 제 핏줄이 궁금해
아무리 캐물어도 어머니는 원망 가득한 얼굴로 고개만
내저을 뿐 대답이 없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뜬 행랑어멈의 아들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아흔아홉 칸 심충익의 집안에는 노비만 해도 수십명이었다.

중종의 척신(戚臣)으로 조정 대신들에게
호령깨나 하다가 나이가 들어 낙향한 심충익은
보령에서도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의 집에서 십수 년을 살아오면서 정휴는 심충익이
하인들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하긴 아들에게도 워낙 말이 없는 심충익이었다.
정휴가 행랑어멈의 아들임을 아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공부가 하고 싶거든 내일부터 내 방으로 오너라."
순간 정휴는 제 귀를 의심했다. 공부를 하러 방으로 오라니.
꿈인지 생신지 몰라 정휴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어느새 심충익은 조용한 성품 그대로 소리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날이 지나고도 정휴는 심충익의
사랑방에 선뜻 들어서지 못했다.

대감이 혹 잠결에 한 소리라면,

혹 취중이었다면... 정휴는 자신이 없었다.
염치좋게 사랑방에 들어갔다가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갖가지 생각이 떠올라 정휴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정휴는 이따금 심 대감이 하인들을 시켜 종의
볼기를 치고 주리를 트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엄한 심 대감이 예기치 않게 자신을 부드럽게
대해준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이유에서만도 아니었다.

심 대감이 진정으로 한 말이라면

한번 더 말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인연이 한번 닿았으면 다시 이어질 때가 있을 것,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사랑방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정휴는 그런 운명을 믿고 있었다.
운명이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제 스스로
달려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인연이 저절로 다시
닿을 때까지 정휴는 더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인연은 거기서 끊어지고 만 듯,

정휴가 사랑에 들어갈 기회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하루가 가고 열흘이 가고 한 달이 가고

또 달이 여러 번 지나도 심 대감은 정휴를 부르지 않았다.
그해 가을이 저물어 가을걷이가 다 끝났을 때였다.
그날도 공기가 차디찬 보름밤이었다.

심충익의 사랑에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달빛 아래서 서성이던 정휴의 발길이

불빛을 본 나방처럼 저절로 사랑으로 옮겨졌다.
"이제야 공부를 하러 오는 게냐."
멀리서 다가오는 정휴의 모습을 확인도 하지 않고
심충익이 나지막하다 못해 졸린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들어오너라."
몸서리가 쳐질 만큼 밤바람이 찬데도 심충익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연못 위로 부서져 내리는 달빛을 보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정휴는 거침없이 사랑으로 올라갔다.
"달빛이 좋지 않느냐?"
심충익은 나직하게 시를 읊었다.

원만 구족한 보름달이 한 줄기 광음을 힘차게 놓으니
일천 강이 모두 다 일천 월일세.
공맹아, 이 달빛을 보았느냐.

그러자 정휴도 지지 않고 시 한 수를 붙였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정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일천 강 일천 월은 다 어디 가고
내 하늘엔 어찌하여 그믐달뿐이런가.
깃들지도 못하고 깃들 것도 없으니
무광천지에 홀로 숨어 있으리.

 

교교하게 밤을 밝힌 달빛 탓일까,

정휴는 제가 종인 것도 잊어버리고

글줄깨나 읽은 한량처럼 심충익의 말을 받고 있었다.
심충익의 위엄 있는 얼굴 위로 섬세한 미소가 잠시 스쳐갔다.
"그래, 등 너머로 어디까지 배웠더냐?"
"<통감>, <소학>까지는 겨우 읽었습니다."
"이웃 홍성현에 퍽 재주가 많은 젊은이가 있다는
소문이던데 너도 그에 못지 않구나.

그럼 사서삼경을 시작해 볼까?"
그렇게 정휴의 공부는 시작되었다.

낮이면 심충익과 정휴는 하늘과 땅 사이인 주인과 종의 신분이었고,
다른 노비들이 곤한 잠에 떨어진 밤이면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로,

나이를 뛰어넘어 글친구로 다시 만났다.
글을 읽을 때면 정휴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글을 읽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종인 자기가
더 이상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인지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글 속에 숨어 있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이 신기롭고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뼈빠지게 일해야 하는 낮이면 늘

어머니의 회초리가 생각났다.

종놈이 문자 배워 어디다 쓸 것이냐던.

그러나

그러한 고민도 공부를 하고 싶은 정휴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밤이면 글 배우는 학생으로,

낮에는 종으로 살아온 지 그럭저럭 다섯 해가 지나고 있었다.

어느새
<사기(史記)>, <근사록(近思錄)>, <춘추(春秋)>,<예기(禮記)>를

다 읽어내어 글 읽는 모양새는 대충 갖춘 셈이었다.

그리고 어제 아침 다섯 해 만에
처음으로 밝은 아침에 심충익의 부름을 받고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채 달려갔던 것이다.
육십 줄에 들어선 심충익은 잔병치레가 부쩍 잦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바싹 마르고 하얀 얼굴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도드라져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심충익은 아무 말없이 누런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네 종문서니라."
종이를 받아든 정휴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너를 보낼 때가 된 것 같구나.

면천을 했다고 해봐야 종신세와 다를 바 없는 가난한 양민일 텐데...
네 재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길이 열리겠지.

그만 물러가 보거라. 피곤하구나."
유난히 툭 불거진 이마의 핏줄이 툭툭 힘겹게 튀는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간 많이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휴는 큰절을 올리고 사랑을 물러나왔다.
정휴는 마치 안개 낀 숲속에 서 있는 것처럼 막막했다.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자 그제야 정휴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종이 한 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정휴는 곧바로 어머니 무덤으로 달려갔다.
"어머니,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정휴는 종문서를 펼쳐 어머니 무덤에 보였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몇 점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하늘은 늘 보던 대로였다.

어제와도 같고 그제와도 같은 하늘이었다.
하늘은 분명 그 하늘이건만 종문서를 받아쥔
정휴에게는 전혀 다른 하늘인 것 같았다.
그러나 정휴는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게다가 종문서를 받아 쥐었다고 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대감 집 문을 박차고 나간다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휴는 전과 마찬가지로 늘상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튿날 이런 정휴를 심 대감이 다시 호출했다.
"왜 떠나지 않았느냐?"
심 대감의 목소리엔 노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곧 농사철이고 일손이 바쁘기에..."
"이 집은 이제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니라.

자, 이걸 갖고 떠나거라."
심 대감은 솜옷 한 벌을 내주었다.
"이 옷으로 갈아입거라.

그리고 오늘 안으로 떠나거라."
말을 마친 심 대감은 사랑문을 닫아버렸다.
정휴는 머뭇거리다가 심충익이 마루 끝으로
밀어놓은 솜옷을 집어들었다.
정휴는 댓돌에 엎드려 큰절을 올린 뒤

방으로 돌아가 봇짐을 꾸렸다.

짐이래야 갈아입을 낡은 옷 한벌,

그리고 조금 전에 심 대감이 준 솜옷 한 벌,
그리고 짚신 몇 짝뿐이었다.
어디로 간다? 막막했다.

갑자기 받아든 자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정휴에게는 심 대감이 언젠가 친구와 나누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랑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홍성에 산다는 심 대감의 친구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심 대감이 무슨 대화 끝엔가 불쑥 이런 질문을 했다.
"홍성현에 재주있는 젊은이가 있다던데 도대체 어떤 아이인가?"
홍성에서 왔다는 심 대감의 친구는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벌써 예까지 소문이 났는가?

하여튼 보통 젊은이는 아닌 것 같으이.

성은 이 씨고, 이름은 지함이라던가 하는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인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장사를 지냈는데,

글쎄 이 아이가 갑자기 어머니 묘소 앞에

조수(潮水)를 막을 방죽을 쌓아야 한다며 제 형을 졸라대더라는구먼."
"바닷가였던 게로구먼."
"아닐세.

나도 그 소문을 듣고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네.

바다에서는 이십 리도 더 떨어진 곳이라네.

그러니 그 형이란 사람이 그 말을 들어줄 리가 있겠나?

아, 그런데 이 아이가 무슨 요령이 났는지 바다를 막아놓고

소금을 구워내어 그걸 판 돈으로 방죽을 쌓았다네.

여기까지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넘기겠는데

그 아이가 방죽을 쌓은 지 두 해 만에 큰 해일이 일어

바로 그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네.

그 아이의 어머니 무덤만 무사하고
근처의 논이고 밭이고 싹 쓸고 지나갔다네.

이것 참 기가 찰 노릇 아닌가."
"어린 아이가 대단하군."
정휴는 바로 그 이지함이라는 젊은이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어쩐지 그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https://jbk1277.tistory.com/151?category=938387 

 

豫言者(Prophet) - 소설^토정비결(上-3)

정휴는 점심때가 조금 지나 홍성현에 도착했다. 정휴는 몸을 쉴 곳도 마련하기 전에 이지함이라는 젊은이를 먼저 만나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령을 떠나던 차림 그대로 이지함의 집을

jbk1277.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