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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物 ^ 소설

死卽生 生卽死(사즉생 생즉사) - 소설^토정비결(上-1)

 

 

上-1.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

 

기나긴 여름해가 기울고

열흘 동안 그의 유일한 동행이던

긴 그림자가 희미한 어둠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정휴(丁休)는 느긋한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휘적휘적 산길을 걸었다.

땅거미는 정휴를 쫓아 산꼭대기로 달려오는 듯

눈에 띄게 짙어 갔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날 만한 소롯길만

뱀처럼 허리를 꼰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가사자락이 나뭇잎을 스치는

메마른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여름밤이면 지칠 줄 모르고 울어대는 부엉이조차

아직 울음을 시작하지 않았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서는 독한 송진 냄새가
천년 묵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릴 듯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다리만 슬며시 움직일 뿐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아서

아주 느릴 것 같은 정휴의 걸음은 매우 빨랐다.

초저녁 산속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한낮의 열기가 식지 않은 여름철,

내쳐 걸어와 가사가 흥건히 젖을 법도 하건만

정휴의 이마에는 땀방울 하나 솟지 않았다.
산등성이를 넘어서자

멀리 아스라한 불빛이 꿈처럼 아련히 떠올랐다.

아산(牙山)이었다.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았다는 토정(土亭) 이지함이

이런 자그마한 고을에서

현감(縣監) 노릇이나 하고 있는 속뜻을

정휴는 아직도 헤아릴 수 없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원대한 꿈으로 동분서주하던 그가

이렇게 작은 고을의 일개 현감을 자원하여

정사(政事)를 맡은 것은 도대체 어떤 속내가 있어서일까.

금강산 깊은 암자에 틀어박혀 있던 정휴가

오랜만에 세상나들이를 하게 된 건 토정 이지함 때문이었다.
어쩌다 금강산의 깊숙한 암자까지 흘러들어오는 풍문에 따르면,

토정은 이제 미래의 일까지 손금 보듯 훤히 들여다보는 모양이었다.

그 경지에는 못 미치더라도 정휴 역시 시간시간 움직이고 있는

세상 한 끄트머리의 작은 변화쯤은 웬만큼 내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세상 일을 아무리 정확히 꿰뚫을 수 있더라도

죽음을 막아낼 장사는 아무도 없는 것을.
토정도 천문(天文)을 읽을 줄 아니

정휴가 본 그 구곡성(九斛星)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으리라.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난 이상 누구라도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를 거역할 수는 없는 법.

게다가 정휴보다 여섯이 위니 토정의 나이 이제 예순둘,
그만하면 천수를 누린 셈이었다.

그 나이에야 죽음이 대수로운 일은 아닐 터였다.
정휴가 구태여 토정의 마지막을 보고자,

버리고 떠났던 세상으로 다시 나올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토정의 죽음을 예감한 순간,

정휴는 임종을 놓칠세라
입고 있던 옷차림 그대로 먼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토정은 이미 죽음 따위는 초월했음에 틀림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휴 역시 초탈한 심정으로

토정을 보낼 수는 없었다.

정휴는 토정의 죽음을 앞에 둔 것이

자신의 죽음과 맞닥뜨린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정휴의 토정이 죽어가기 때문이었다.

정휴의 마음속에서 항상 등불이 되었고,

나침반이 되었던
스승 토정이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토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정휴 자신의 문제,
절실한 정휴 자신의 문제였던 것이다.
정휴는 잠시 고갯마루에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토정,

그는 누구인가?

스승인가?

도반(道伴)인가?
친구인가?

토정은 왜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인가?

왜 나는 토정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근본도 모르던 정휴에게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친구가 되고,

형이 되고,

스승이 되었던 토정.
종이라는 좌절감,

그래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막연히 길을 떠났던 정휴에게

운명처럼 나타났던 토정.
정휴는 그로 인하여 비로소 인간으로서 삶을 새로 살기 시작하였고,

그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찬찬히 살펴보면

정휴의 인생살이에서

토정과 연관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

내 죽음이나 마찬가지지.

토정에 의지해 꾸려왔던

내 삶이 죽어가고 있는 거야.

토정이 죽고 나야

비로소

내가 나로서 새로이 태어나는 거야.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이리라."
정휴의 나이도 쉰이 훨씬 넘었건만

정휴 자신은 제 나이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저 토정의 이마에 서린 주름을 보며

토정이 나이를 들어가는가 보다 했을 뿐,

정휴 자신의 볼에 깊이 패이는 세월은
들여다보질 못했다.

언제나 토정의 제자,

아우라는 생각만 했지

따로 떨어져 살아야겠다든가,

자신도
스스로 늙어가고 있다든가 하는 생각은 갖지 못했다.
정휴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윽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정휴는

이내 발을 재게 놀려 아산현에 도착했다.

작은 현이라서 그런지
관아라고 해도 보잘것없이 작고 초라했다.

관아 돌담을 지나 후문에 이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비 한명이 허리를 굽히고 앞으로 나섰다.

"어서 오십시오.

현감 어른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제법 총명한 기색이 엿보이는 젊은 관노였다.
정휴보다 한 발 앞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관노의 자세에는

예사 노비와 달리 비굴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행동거지가 절도 있고 단정했다.
문득 정휴의 얼굴에 차디찬 냉소가 흘렀다.
그런데 노비가 뭐라고 했는가.

현감 어른이 기다리고 계시다고?

내가 누군지도 모를 터인데?
"저를 따라오십시오."
정휴는 젊은이의 얼굴을 애써 외면하며,

서늘한 기운이 서린 동헌 앞마당을 지나 내당으로 들어갔다.
"손님 오셨습니다."
낭랑한 목소리로 안을 향해 외친 젊은 관노는
정휴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인 다음

발소리를 죽이고 공손히 물러났다.

정휴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뒤 방문을 열었다.
"어서 오시게. 뭐하러 이 먼 길을 달려오셨나.
어차피 한곳에서 만나게 될 것을..."
토정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정휴는 등에 진 바랑을 내려놓고

절에서 하는 법도대로 토정에게 큰절을 올렸다.

토정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침침한 방안에 기괴하리만큼 거대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춤을 추듯 일렁거렸다.
"용우를 보셨나?"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정휴를 보자

토정은 창백한 얼굴 가득 화사한 웃음을 띄웠다.
토정은 정휴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강산에서 떠난 때는 물론

아산 관아에 다다르는 시간까지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토정은
정휴가 아산현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용우라는 관노를 마중내보냈던 것이다.

"자네를 맞이한 젊은이 말일세.

생각나는 게 없던가?"
정휴는 여전히 꼼짝 않고

눈만 들어 토정을 바라보았다.
토정은 이미 떠날 준비를 다 한 듯,

마음이 평화로운 모양이었다.

의관도 깨끗이 차려 입었고 병석을 다 치워놓고 있었다.
"대물림으로 내려오는 관노일세.

어미도 아비도 이곳 현의 노비지."
한일자로 짙은 정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휴의 심중에 이는 동요를 모를 리 없건만

토정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아이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자네도 읽었을 터... 어떤가?

저 아이를 데려가지 않으려나?"
노비를 데려가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정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젊은 노비를 보는 순간

옛날의 자기 자신을 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휴가 토정을 만난 지 어언 삼십여 성상(星霜),
행주좌와(行走坐臥)의 연결 고리가 다 토정에 얽혀 있었다.

토정은 정휴를 정휴로만 보고 만났던 것이 아니었다.

힘없는 한 백성, 그래서 토정이 구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휴는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더

토정과 가깝게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토정이 처음에 가졌던 생각이

바뀌지 않았음도 잘 알고 있었다.
임종을 눈앞에 두었으니

내게 할 말이 오죽 많을 것인가.

그런데 먼 길을 달려온 사람에게

기껏 노비 이야기나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너도 한때는 종이었으니, 그 뜻인가?
"진작 면천(免賤)시키려 했으나 꾹 참고 오늘을 기다렸다네.

저 녀석에게 아우님 만한 스승이 어디 있겠나."
정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하여 면천한 종 하나가 다시 종살이보다 더 힘든

기나긴 구도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인가.

그때였다.

문밖에서 여인의 나지막한 기침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히 문이 열렸다.

마흔댓쯤 되었을까.
이마에 굵은 주름이 가로 새겨져

험하게 살아온 과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표정은
깊은 물 속처럼 차분하고 평화스러워 보이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약사발을 두 손으로 곱게 받쳐들고 있었다.
여인은 낯선 손님인 정휴에게 보일 듯 말 듯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토정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게 약사발을 올렸다.

토정이 다 마시기를 다소곳하게 기다리고 있는 여인은

어느 모로 보나 관아의 노비 같지 않았다.

"아우님, 해사에 갔던 일, 기억나는가?"
해사?

화담과 토정이 여행하던 중에 지났다는 곳,
훗날 정휴도 토정을 따라 그곳에 잠시 들렀었다.
기묘한 풍속이 있는 고을이었으나

정휴는 별로 관심에 두지 않았었다.
"얼핏 생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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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껏 그런 걸 다 마음에 붙들어놓고 계시는군요.

형님답지 않습니다."

그러자 토정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약사발을
가지고 들어온 여인을 그윽히 바라보았다.
"어찌 그곳을 잊겠는가.

벌써 삼십 년이 가까워오는 까마득한 옛날의 일.

그날 밤의 묘한 경험이 아직까지도 진득하니 남아 있다네."
이 엄숙한 임종의 시각에 토정이 

왜 이런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는지 정휴는 알 수 없었다.
토정이 비운 약사발을 내려놓자

여인은 두 손으로 집어들고 뒷걸음으로 방을 물러나갔다.
"형님, 한 말씀 해주십시오."
정휴가 침묵을 뚫고 한마디 던졌다.
토정은 대답은 하지 않고 나지막이 웃었다.

토정의 낮은 웃음소리가 등잔불이 희미하게 빛나는 방안에
깊은 산중의 메아리처럼 울렸다.
정휴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토정이 자신의 죽음을 모르진 않을 텐데,

죽음을 앞둔 사람치곤 너무 일상적인 말만 하기 때문이었다.

정휴는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그 머나먼 길을 달려왔는지 난감한 기분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한동안 계속하더니
토정은 갑자기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는 광풍에 꺼져가는 불길처럼

쇠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만 건너가 보시게.

생각해야 할 게 많다네.

세상과 맺은 인연도 이제 다해가는구만.

한때는 온세상을 손아귀에 넣은 것 같더니

이제 돌이켜보니 다어리석은 자만일 뿐이었네.

물이 흘러 바다가 되듯,
계절이 쉼없이 바뀌듯

나는 그저 왔다 가는 것인 모양일세.

부처가 왔다 가도 세상은 아무런 변함없이
흐르고 또 흐르듯이.
나 같은 범상한 인간이 살다 가는 데

뭐가 이리 헤아릴 게 많은지,

사람 하나한테 딸려 있는 세속 잡사가

무에 이다지도 많단 말인가.

한 갑자(甲子)를 겨우 넘기고 떠나는 몸,

나 하나 떠나간다고

세상에 무슨 변화가 일겠는가.

그저 한 인간이 왔다 가는 것일 뿐.

내 발자국을 보고 후세 사람들이 뭐라 한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왜 이리 적막한지 알 수가 없네.

고승들처럼 허허 웃으며
홀가분하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정휴는 그 이유를 가늠잡아 보았다.

언제나 백성,
백성 하면서 살아온 그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러나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었다.

토정, 그의 깊은 심중을
정휴의 짧은 자(尺)로써는 감히 잴 수 없었던 것이다.
토정의 목소리가 조용히 잦아들고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꼿꼿하게 버티고 앉아 있는

토정의 얼굴에서 정휴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정휴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토정의 침묵과 마주하니,

금강산에서 아산까지 오는 동안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던

수많은 의문과 고민을 감히 토해낼 수 없었다.

대답을 듣지도 못한 의문들이
가슴속에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있었다.

토정의 입에서는 건너가란 말도,

더 있으란 말도 나오지 않았다.

토정은 그저 석상(石像)처럼 앉아서
잠자코 시간의 흐름에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정휴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묵은 피로가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몸이 천근만근이나 되는 듯 무거워졌다.
정휴는 비틀거리면서 토정의 방을 나섰다.
밤하늘에는 어느새 광활한 우주를 뒤덮을 듯

무수한 별이 돋아나 있었다.

정휴는 마루 기둥을 붙잡고
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는 젖빛 은하수를 우러러보았다.
또 어느 목숨이 죽어가는 것일까.

별똥별이 길게 꼬리를 그으며 떨어지고 있었다.
"스님. 이리 오시지요."
용우라는 그 관노였다.
정휴는 별빛을 받아 해사하게 빛나는

용우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구릿빛으로 그을은 얼굴에 검은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열여섯이나 되었을까.
제 손으로 밥을 떠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종노릇을 했을
용우의 몸은 탄탄하고 건장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뜯어보는데도

용우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밝게 웃어보였다.

자기를 이모저모 살펴볼 만한 시간을 충분히 준 다음

용우는 앞장서서 화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용우가 안내한 곳은 사랑채도 행랑채도 아니었다.
내당과 담이 이어졌으나 관아에는 없는 별채였다.
새로 지은 듯 소나무 향기가

아직도 그윽히 풍기는 넓은 방이 있었다.

방 안쪽에는 걸인인 듯

남루한 옷을 걸친 초라한 중늙은이 십수 명이,

몇은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고 몇은 누워서 자고 있었다.
정휴가 방안을 휘 둘러본 후 눈길을 돌리자 용우는
송구스런 듯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현감 어른이 이리로 모시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어디든 가릴 건 없었다.

매섭게 몰아치는 비바람만 거적대기로 간신히 가린

산중의 그의 거처에 비하면 여기는 아방궁과 다를 바 없었다.

정휴는 바닥이 다 닳은 짚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한여름밤이지만

활짝 열린 뒷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방안이 서늘했다.
"스님, 공양은요?

안 드셨다면 차려 올리겠습니다."
"괜찮네."
어차피 사람들의 적선이 아니면

굶어 죽을 중의 몸이었다.

금강산에서 아산까지 오는 동안

한양을 지나면서부터는 굶고 있는 사람 투성이라

정휴 역시 끼니 한번 변변히 챙겨 먹지 못했다.

그런데도 정휴는 별로 허기가 지지 않았다.
괜찮다는데도 용우는 미적거리며 자리를 얼른 뜨지 않았다.
"저...스님, 언제 떠나십니까?"
벽을 향해 가부좌를 틀다 말고 정휴는 용우를 돌아보았다.

용우는 형형한 눈빛으로 정휴를 보고 있었다.

기이하게 사람을 빨아들이는 눈빛이었다.
"그건 왜 묻나?"
정휴의 물음에 용우는 사내답지 않게

긴 목을 살짝 숙이며 수줍게 웃었다.

"저를 데려가실 것 아닙니까?

저도 준비를 해야지요."
"어르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던가?"
"예. 조금 있으면 제 스승이 오실 거라고.

스님이 오시면 따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우리 인연인 모양이군.

더 기다릴 게 뭐 있겠나.

운명하시면 바로 떠나도록 하세."
정휴는 용우를 등진 채 천천히 가부좌를 틀고
염주를 돌리기 시작했다.
"예? 운명이라뇨?

무슨 말씀이십니까?"
"..., 그만 쉬겠네."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말라는 듯 정휴는 냉랭하게 말했다.
용우는 한참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이보게. 잠깐만. 이 방은 뭐하는 덴가?"
정휴가 면벽(面壁)을 한 채 용우에게 물었다.
"걸인들이 쉬었다 가는 걸인청(乞人廳)입니다.

현감께서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지으신 건물이지요.
이곳을 지나는 걸인이면

아무나 여기서 먹이고 재우고 기술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제각기 기술을 익히고 적으나마 살림 밑천을 마련하면

양민이 되어서 이곳을 떠납니다.

그동안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 무수히 많습니다.

덕분에 이곳 아산의 걸인과 유랑민은 다 없어졌지만,

소문을 듣고 방방곡곡에서 걸인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이곳은 언제나 북적거립니다.
현감 어르신은 이곳에서 걸인, 유랑민들과 함께
진지를 잡수시고 일도 같이 하십니다.

현감 어르신이 오신 덕택에 이곳 아산은 태평성대지요.

고을 사람들은 지금이 바로 요순시절이라고

모두 한입처럼 말합니다."
"알겠네."
대륙의 한 끄트머리,

그 중에서도 한가운데

조그만 아산땅에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

토정은 이곳으로 왔는가.

그런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의 말대로 부처가 다녀갔어도

이 세상이 변하지 않았는데,

토정이라고 해서 대수가 있을 것인가.

가부좌를 하고 있는 정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오늘 밤,

토정은 이 밤을 넘기면 이승을 떠나가리라.

대체 토정은 무슨 생각을 하길래 시원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걸인들의 방으로 정휴를 보낸 것인가.

끊임없이 변하고 흘러가는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으면서도

토정은 왜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는 것인가.

정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위는 적막했으나

간간이 걸인들이 코고는 소리가
정휴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용우... 이건 또 무슨 놈의 끈인가.

세상에 대한 집착을 모두 버리고자

산으로 들어간 정휴에게

토정은 세상의 질긴 연을 다시 맺어주려는 것이었다.
정휴는 눈을 꽉 감았다.

감은 눈앞으로 자신의 어린시절,

용우보다 몇 살 위였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토정과 길고 질긴 연이 맺어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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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免賤) - 소설^토정비결(上-2)

벌써 절기로는 입춘이건만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도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심 대감 댁을 떠나올 때 하인들은 심 대감이 쓴 입춘방(立春榜)을 기둥마다 붙이고, 대문에도 붙이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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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wwwbudongsan114/961882

 

토정비결

역학 이야기 - 토정비결 (상 ) - 역학(易學) 토정비결 : 자료를 옮겨 적은 글 입니다. 기록 일시 : 2017. 4. 29. 토정비결(상) - 이재운 저 ----- 차 례 ----- 작가 소개 작가의 말 1.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 2. 면천(免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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