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신미 대사의 한글 창제 뒷이야기 < 불서 < 출판 < 기사본문 - 법보신문 (beopbo.com)
중이 임금 눈에 들어 무엇합니까” / 정찬주 장편 ‘천강에 비친 달’ -1-
1420년 8월 6일.
흥천사 경내는 이른 새벽부터 1백여 명의 스님들로 붐볐다.
사미승은 물론 동자승들까지 경내를 바삐 오갔다.
법당에 올릴 재물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공양간을 들락거렸다.
노비들은 빗자루를 들고 산문 앞 사하촌의 고샅길부터 쓸었고,
여종들은 법당 마룻바닥은 물론 기둥까지 마른 천으로 닦았다.
처마 그늘에 선 벼슬아치들도 땀을 바질바질 흘렸다.
원경왕후의 4재를 감독하기 위해 의정부에서 나온 벼슬아치들이었다.
태종의 비(妃)인 원경왕후 여흥 민씨는
양녕, 효령, 충녕(세종), 성녕 등 4대군과
정순 등 4공주의 어머니였다.
늙은 당상관까지 나와 재준비를 감독하고 있는 것은
세종이
특별히 흥천사로 거동한다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중이 임금님 눈에 들어서 무엇을 합니까?
저는 벼슬을 얻어
출세할 마음도 없고 상을 받아 부를 쌓을 마음도 없습니다.
다만
은사님 문하에서 불도를 닦아 성불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좁은 소견을 버려야 한다.
인연을 따르는
수연행(隨緣行)을 닦는 것이 도(道)에 가장 빨리 드는 길이다.
성불하겠다는 집착마저 내려놓아야
마침내
진승(眞僧)이 될 수 있느니라. 알겠느냐?”
앳된 중을 이리저리 다독거리고 있는
스님의 당호는 함허당(涵虛堂),
법호는 득통(得通),
법명은 기화(己和)였다.
3년 전 한 겨울이었다.
속리산에 며칠째 폭설이 내린 뒤 눈보라가
산허리의 소나무,
잣나무 가지들을 뒤흔들어대는 날이었다.
회암사에서 복천암으로 내려와 잠시 머물던 스님은
거지행색의 소년에게
아랫목이 설설 끓는 죽석이 깔린 방을 내준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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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orean.go.kr/nkview/nklife/2003_3/2003_0315.pdf
https://ko.wikipedia.org/wiki/%ED%9B%88%EB%AF%BC%EC%A0%95%EC%9D%8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