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강의 기적 ^ 새마을 운동

경부고속도로 - 獨 ^ 아우토반 - 현대자동차 - 정주영 ^ 해보기나 했어! . 들이 대(DID)! - 박태준 ^ POSCO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서

 

아우토반을 달리는 차 안에서 에르하르트 당시 서독 수상은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경제 하부구조에 대한 공공투자를 과감하게 하십시오.

히틀러는 독재자였지만 독일 국민에게 아우토반을 남겼습니다.

 

한국의 지형은

산악이 많고 지역간 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곳일수록 대동맥을 뚫어야 합니다.”

 

아우토반의 감동은

박 대통령에게 고속도로 건설의 ‘꿈’을 심어줬고,

이 꿈은 6년 후 경부고속도로 준공이라는 대역사로 이어진다.

 

 

youtu.be/cdaO86v42iM

 

‘경제 신화’ 산증인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SPECIAL INTERVIEW] ‘라인 강’에서 ‘한강의 기적’ 꿈꾼<br/>코리안 눈물, 희망의 밑거름 되다 (economychosun.com)

 

‘경제 신화’ 산증인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SPECIAL INTERVIEW] ‘라인 강’에서 ‘한강의

‘경제 신화’ 산증인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SPECIAL INTERVIEW] ‘라인 강’에서 ‘한강의 기적’ 꿈꾼
코리안 눈물, 희망의 밑거름 되다

economychosun.com

 

2년여에 걸쳐 개인적인 연구를 끝낸 박정희는

67년 10월 주원 건설부 장관을 불러

“기존 국도를 확장하는 것도 좋고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도 좋다.

내년초 착공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안을 수립해 보고하라”며

고속도로 건설을 공식 지시한다.

 

정부는 11월 14일 여당과 연석회의를 열어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건설을 최종 확정하고,

곧바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

실무작업에 착수했다.

 

1968년 2월 1일 박 대통령은

서울 원지동(현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부근)에서 거행된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건설공사 기공식에 참석,

발파스위치를 눌렀다.

 

폭음과 함께 서울을 둘러싸고 있던 남쪽 바위산의 암벽이 쪼개졌다.

 

4년 전 서독 아우토반에서 품었던

고속도로 건설의 꿈이 바야흐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실록! 한국경제]④ "아! 경부고속도로" | 블록미디어 (blockmedia.co.kr)

 

[실록! 한국경제]④ "아! 경부고속도로" | 블록미디어

‘고속도로’라는 생소한 용어가 국민들에게 처음 전해진 것은 67년 4월이었다. 그해 5월 있을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직의 박정희 대통령과 야당의 윤보선 후보가 치열한 선거전을 벌이

www.blockmedia.co.kr

지도를 받아보니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고속도로 예정선이 그려져 있었는데,

손때가 많이 묻어 있어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테이블 위에다 트래싱을 하려고 하자,

박 대통령은 창문에 대고 그려보라고 하였다.

 

지시대로 하였더니

확실히 테이블 위에서 그린 것보다 햇빛이 투과하여 훨씬 선명하게 잘 그려졌다.

그 후 어느 월요일 이른 아침 출근하자마자 대통령이 호출하였다.

 

당장 대통령 집무실로 달려갔더니 현재 몇 명이 작업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육군 중령 1명과 건설부 기좌 1명이 있다고 대답하였더니

월동 김장용으로 쓰라며 금일봉을 주었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다며 우리 일행을 격려해 주었다.

 

이어 박 대통령은 벽에 걸려 있는 1/12,500 지도를 가리키면서 지시했다.

 

“어제 일요일에 내가 직접 도로 노선을 알아보려고 길을 나섰더니

처음에는 주민들이 나를 몰라보다가 시간이 지나자 알아보고 모여드는 바람에

더 이상 둘러보지 못하고 돌아섰어.

 

그러니 지금부터 자네는 아무도 만나지 말고

몰래 우리가 상의한 서울~수원간 노선을 답사하고

그 결과를 오늘 중으로 나에게 보고하게”

 

www.ltm.or.kr/2009/board.php?board=kkkwebzine2&category=1&command=body&no=2

 

월간 국토와교통

경부고속도로 건설 뒷이야기① 三無 상태, 치열한 전투 윤영호 / 신영기술개발(주) 회장  삼무(三無) 상태에서 이루어낸 기적적인 공사 1968년 2월 1일 기공하여 1970년 7월 7일 준공한 경부고속도

www.ltm.or.kr

 

 

https://blog.naver.com/cbg6218/222781378288

 

열하일기(熱河日記) ^ 燕巖(연암) 박지원(朴趾源) - 수레.馬車 ^ 道路(도로)

고구려는 수레의 나라라 불릴 정도로 많은 수레를 보유했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일상생활에 수레가 활발하...

blog.naver.com

 

왼쪽 윗줄부터 시계방향으로 국제차량주식회사의 &lsquo;시발자동차&rsquo;, 현대자동차의 &lsquo;포니&rsquo;, &lsquo;쏘나타2&rsquo;, 대우자동차의 &lsquo;티코&rsquo;&nbsp;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자동차는

 1955년 출시된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의 ‘시발자동차’다. 

국내에서 자동차 생산이 처음으로 시작됐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한글로는 ‘시-바ㄹ’로 표기했다. 

시발자동차는 배기량 2도어 4기통 1323cc 엔진에 

전진3단, 후진1단 트랜스미션을 얹었다.

성능은 좋지 않았지만 출시 당시 가격은 8만환. 

국민 1인당 연평균 소득이 60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이라면 약 3년을 모아야 하는 거금이었다.

시발자동차는 

미군이 버린 드럼통을 망치로 펴서 자동차 외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미군이 버린 폐기된 차에서 쓸 수 있는 엔진과 부품을 골라내 재생하고. 

모자라는 부품은 직접 제작해 만들어냈다. 

초기 시발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데 걸린 시간은 최대 4개월이었다.

 

www.iminju.net/news/articleView.html?idxno=24555

 

[경제비사 제11탄-62년 車 역사] 깡통부터 자율주행차까지…변방에서 강국으로 - 민주신문

[민주신문=신상언 기자]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자동차 생산·수출 강국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2015년 기준 수출 규모 세계 5위,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세계 4위를 차지할 만큼 엄청난 생산

www.iminju.net

 

 

kids.hyundai.com/kidshyundai/AutomobileManagement/learnauto/automobileDet.kids?cotnSn=2510

 

전체보기 목록 | 자동차 | 키즈현대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동네 앞 도로에 자가용 자동차가 지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신기하고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때 그 시절 도로 위를 누비던 현대자동차가 포니(PONY)였죠. 이제는 자

kids.hyundai.com

 

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kyung0512&logNo=22120816968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현대자동차 -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발전의 역사

세계자동차브랜드(6)...한국 현대자동차그룹 세계적으로 이름난 자동차브랜드가 많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

blog.naver.com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창립을 시작으로

1950년 현대건설 출범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

서산 간척지 개발, 88 서울 올림픽 유치 노력,

1998년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하하는 등

 

한국이 산업화와 국제화로 나아가는 주요 고비마다

정 명예회장은 큰 족적을 남겼다.

 

아산(정주영)은 타고난 벤처기업가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그의 어록에는

이같은 스타트업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산이 조선소를 만들겠다고 했을때 던진

“이봐, 해보기나 했어?”( 들이 대 ; DID)는

도전정신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아산이 첫번째 배를 영국에서 수주할 때

A&P 애플도어의 찰스 룽바툼 회장에게

거북선 그림이 그려진 오백원권 지폐를 보이며 설득했던

일화는 아직도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다.

 

www.edaily.co.kr/news/read?newsId=01200486609569000&mediaCodeNo=257

 

[정주영 탄생 100주년]①"이봐, 해보기나 했어?" 도전정신 재조명

범 현대그룹의 창업주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바꾸는 ‘아산의 도전정신’이 재조명받고 있다.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210번지

www.edaily.co.kr

 

tiqui-taca.tistory.com/41

 

현대자동차의 역사

오늘은 현대자동차의 역사에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현대자동차의 주인 정주영 회장의 어록중 이런말이 있습니다 " 해보기는 했어 " DID (들이대) 정신으로 "세상과 맞서라" 정주영 회장이 말한

tiqui-taca.tistory.com

youtu.be/ujShtSZvw8Y

 

“여보게, 이거 어디 되겠는가?”

 

1968년 11월.

모래바람 부는 황량한 포항제철 건설 현장을 바라보며

박정희 대통령이 내뱉은 한마디다.

당시 옆에 있던 박태준 포철 사장은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박 사장은 후일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양반이 날더러

모래속에 파묻혀 죽으라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한국 경제성장의 양대 기둥 역할을 하는 ‘포항제철’ 신화

이렇게 영일만 허허벌판의 모래바람 속에서 시작한다.

 

군복을 벗은 박태준에게 박 대통령은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밀사 역할을 맡으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이후 박태준은 8개월여간 일본에 머물면서

양국 관계정상화를 위한 물밑작업을 진행했다.

 

이 때 만난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이

후일 포항제철 건설에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된다.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 아이디어는

박태준 사장이 처음 제기한 것으로

포철 20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외자도입을 위해 미국 코퍼스사를 방문했다가

절망적인 답변을 받고 귀국길에 오른 박 사장이

‘대일자금 전용’ 아이디어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www.blockmedia.co.kr/archives/81258

 

[실록! 한국경제]⑦ ‘영일만 신화’ 포항제철 | 블록미디어

“여보게, 이거 어디 되겠는가?” 1968년 11월. 모래바람 부는 황량한 포항제철 건설 현장을 바라보며 박정희 대통령이 내뱉은 한마디다. 당시 옆에 있던 박태준 포철 사장은 가슴이 철렁했다고

www.blockmedia.co.kr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박태준은

박정희에게 미션을 받습니다.

 

먼저 1964년,

적자였던 대한중석 사장을 맡게된 박태준은

현장에서 경영의 실제를 배우고 경험하면서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 기업으로 바꾸게 됩니다.

 

1967년 9월,

드디어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국가의 운명을 바꿀

‘산업의 쌀’, 제조업의 핵심인 철강 산업을 일으키라고 지시합니다.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이렇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박태준은

군인답게 바로 철강 산업에 뛰어듭니다.

 

youtu.be/g5M22xuCQj4

대규모의 공사 과정에서

각종 이권 개입 문제가 발생하자

 

박정희는 직접 친필로 쓴

‘설비 구매에 관한 재량권 위임’ 일명,

종이마패를 박태준에게 전달합니다.

 

즉 포철에 한해서는 박정희 본인을 비롯해 아무도 간섭할 수 없고,

전적으로 박태준에게 믿고 맡기겠다는 신뢰와 함께 절대적인 권한을 위임합니다.

 

youtu.be/_LPHQR926CE

 

각하!

 

 불초(不肖)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포항제철은 '빈곤타파(貧困打破)와  
 경제부흥(經濟復興)'을 위해서는 일관제철소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각하의 의지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바로 어제,

포항, 광양의 양대 제철소에 
 조강생산 2,100만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大長征)을 마무리하였습니다.

 

하면 된다'는,

각하께서 불어 넣어주신  
 국민정신의 결집이

절실히 요청되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혼령이라도 계신다면,  
 불초 박태준이 결코 나태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년 전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잘 사는 나라'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불민한 탓으로

각하 계신 곳을 자주 찾지 못한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엎드려 바라오며,

삼가 각하의 명복을 비옵니다.
 
 부디 안면(安眠)하소서!
 
  1992년 10월 3일 
 불초(不肖) 태준(泰俊)올림

 

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1/12/14/2011121400002.html

 

박정희 영전에 올린 박태준 보고서

박정희 靈前에 올린 박태준의 보고서     "포항 제철의 大役事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다시 읽어보는 故박태준회장의 25년만의 보고서     다음의 글은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대

www.newdaily.co.kr

 

https://jbk1277.tistory.com/1083

 

철강王 ^ 박태준 일대기 - 불꽃 속으로 - POSCO 歷史(1)

https://blog.naver.com/cbg6218/222608549624 철강王 ^ 박태준 일대기 - 불꽃 속으로 - POSCO 歷史(1) “대통령 주변에 있던 대부분은 ‘상황이 어렵기는 하나 타개할 수는 있다’는 낙관론을 이야기할 뿐 외환.

jbk1277.tistory.com

 

POSCO 포항

 

POSCO 광양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단호한 목소리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발표했다.

 

80년대 비전으로 제시한

‘수출 100억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 경공업 구조에서 벗어나

중화학공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반 만년 농업국가에서 벗어나

중후장대형 신흥 공업국가로 경제구조를 확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실록! 한국경제]⑧ 가자! 공업대국으로 | 블록미디어 (blockmedia.co.kr)

 

[실록! 한국경제]⑧ 가자! 공업대국으로 | 블록미디어

“우리나라는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 육성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박정희

www.blockmedia.co.kr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 - 英文本 - 아! 함보른 탄광... - DR^백영훈 (tistory.com)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 - 英文本 - 아! 함보른 탄광... - DR^백영훈

國民敎育憲章(국민교육헌장) The Charter of National Education youtu.be/3Syifru8BR8 우리는 民族 中興의 歷史的 使命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We have been born into this land, charged with  the histor..

jbk1277.tistory.com

 

철(鐵. Fe)의 역사(1) - 빅뱅(Big Bang)의 시대 - 지구와 鐵 - 인간과 鐵 (tistory.com)

 

철(鐵. Fe)의 역사(1) - 빅뱅(Big Bang)의 시대 - 지구와 鐵 - 인간과 鐵

박 대통령의 열정과 사명감에 감화된 에르하르트 총리는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나는 경제장관 때 한국에 두 번 갔다 왔습니다. 한국은 산이 많아 경제 발전이 어렵습니다. 아우토반(고속

jbk1277.tistory.com

youtu.be/QxOXWnC_cN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