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보리피리 삘리릭 춤추는 소리
보릿고개 허기진 배
잠 못 이루네.
춘삼월 삘리릭 서러운 소리
뱃가죽 달라붙어
도랑물 이루네.
가려네 삘리릭 어서 가려나
보릿고개 가렴아
어서 가렴아.
(윤용기·시인, 1959-)
60년대까지 우리는
보릿고개가 오면
산과 들을 헤메며 나무껍질을 캐어
굶주린 배를 채워야했다.
보릿고개(황금찬)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갔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미터
근면 자조 협동의 슬로건 아래
70년 4월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지붕개량,
마을안길 넓히기,
하천정비 등
온갖 협동사업을 실시했다.
70년대 농촌에서 벌어진 사업중
새마을의 `새'자가 들어가지 않은 사
업은 없었다.
사람들은 `새벽종이 울렸네'라는
새마을 노래로 하루를 시작했으며
경제·언론·종교·학계 지도자들은
반강제로 새마을교육을 받아야 했다.
새마을운동은
국민들의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자극해
농촌과 도시를 근대화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www.mk.co.kr/news/home/view/1999/12/113222/
"보리고개가 제일 높은 고개이옵니다."
"보릿고개는 산의 고개도 아닌데 어이하여 제일 높다 하는고?"
"농사 짓는 농부들은 보리이삭이 여물기도 전에
묵은 해 식량이 다 떨어지는 때가 살기에 가장 어려운 때입니다.
그래서 보리고개는 세상에서 가장 넘기 어려운 고개라고 할 수 있지요."
m.blog.daum.net/hoho8413/11441
진성 - 보릿고개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 고갯길
주린 배 잡고 물 한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에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아야 우지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 고갯길
주린배 잡고 물 한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에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 피린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어머님의 통곡이었소
nationbrand.modoo.at/?link=3r0f75u6
http://m.seongjuro.co.kr/view.php?idx=46389
홍익희 교수의 음식 교양이야기(보리) 7 - 헬스컨슈머 (healthumer.com)
보릿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 황금찬의 시 <보릿고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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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190531/95780910/1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습니다”
1972년 5월 30일, 중앙청 회의실에서 무역확대진흥회의가 끝난 후 오원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을 보고했다. 오원철의 저서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을 만들었나』에는 당시 보고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는 제2차대전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에 치중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사정과 같습니다. 그 뒤 일본의 수출액이 20억 달러에 달했을 때,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때가 1957년도입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67년에 일본은 100억 달러 수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일본은 기계제품과 철강제품이 수출의 주력 상품이 되었습니다.”
며칠 후 또 다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간 오원철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소재나 부품, 중간제품의 국산화를 위해 종합제철, 석유화학, 조선, 전자, 방위산업과 자동차공업 건설을 건의했다. 오원청의 보고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 건설과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한 중화학공업 건설계획 작성을 지시했다.
1973년 1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하게 된다. 오원철의 아이디어에 의해 10년의 세월과 80억~100억 달러의 대규모 투자가 요구되는 대역사의 시동이 걸린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은 최고의 정책이었다.
당시 한국의 수준은 민간 경제 부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를 아는 사람이 없는 후진국이었다. 때문에 누군가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은 정부뿐이었다. 때문에 정부, 즉 오원철과 박정희는 지어야 할 공장을 선정하고, 우선 순위를 정했으며, 공장을 지을 때 들어갈 자금도 지원해주고, 공장이 지어진 후에는 어떻게 보호를 하겠다는 계획까지 미리 알려준 다음 민간 기업에 그 임무를 맡겼다.
국제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려는 후진국 한국 입장에서 볼 때 수요가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한 기업에게 독점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공업화 초기 단계에서 독점기업을 만들어, 이 기업을 적극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독점 시비, 재벌 육성, 정경유착 같은 비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개발도상에 있는 후진국 상황에서 경쟁이 만능은 아니란 사실을 오원철과 박정희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정부 역할은 각 분야 공업이 국제규모로 성장하여 국제경쟁력이 생길 때까지만 도와주고, 그 후에는 민간주도 형태로 전환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도저히 산업화 추진이 불가능했다.
오원철과 박정희는 여러 가지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초기 단계에서 독점을 허용하여 하루속히 공장 규모를 국제규모로 성장하도록 유도했다. 그 기업이 충분히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면 경쟁체제로 들어가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독점기업 육성, 정경협력, 경제독재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국제경쟁 단위의 중화학공업 건설 작전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중화학공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19329
https://swk3169.tistory.com/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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