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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찾아서

圃隱 정몽주 丹心歌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유명한

이방원의 '하여가'와

포은선생의 '단심가'는

바로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 삼아

정몽주와 이방원이 만났을 때 서로 주고 받았던 시조입니다.

나와 함께 대업을 이루자는 이방원과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정몽주 간에 당시 팽팽했던 대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내용이죠.

 

하여가 (何如歌)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 (丹心歌)- 정몽주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원(부인)이 계략을 써서 그를 초청했다고도 하는데,

이때 이미 이방원(부인)은 심복부하 조영규를 시켜 쇠뭉치를 꺼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여버려라 하고 지시하였고,

정몽주는 변중랑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다고 합니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말을 타고 이성계의 자택을 떠났지만,

돌아오면서 친구 집에 들러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고 했다는데요,

 

말을 끄는 사람이 정몽주 선생이 술이 너무 취해 그러는가 하고 의아해 물으니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찍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정몽주는 곧 닥쳐올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던 거죠.

 

 

그 말을 이해 못한 마부는 말을 끌고 선죽교로 향했는데,

선죽교를 넘으려 할 때 멀리 숨어 있던 궁사가 정몽주를 저격하여 넘어트렸고,

순간 조영규가 이끄는 고여, 조평 등 5~6명의 괴한이 나타나 부상당하고 도망치는

정몽주를 쫓아가 철퇴와 철편으로 때려 암살했습니다.

 

 

 

이때 그가 조영규, 고여, 조평 등의 철퇴에 맞고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에 일부 묻었는데,

 

 

후일 백범일지에 의하면 1945년 이후 김구선생이

선죽교를 방문할 때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선죽교에서 정몽주가 암살을 당한 후 선죽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후 이 다리는 원래 선지교라고 하였으나 다시 선죽교로 이름이 바뀌어졌고,

당시 정몽주의 나이는 향년 56세였습니다.

 

 圃隱 선생의 묘역은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 3번지에 

 

영모재

순절한지 9년 후에야 비로소 그의 충절과 학문이 인정되었다.
조선 태종 즉위년(1401)에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와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의 작훈을 내렸다.

 

태종 6년(1406) 3월에는 개성의 풍덕에 초장하였던 묘소를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으로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

본래는 포은의 면례지가 능원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살피건대, 생전에 용인지역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던

포은의 장례를 지금의 위치에 모실 까닭이 없다.

 

전설에 의하면, 포은선생이 선죽교에서 피살된 직후에는

개성의 풍덕에 처음 장례를 지냈었다.

그후 신원되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장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면례 행렬이 지금의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렀을 때 신기한 일이 생겼다.

앞에 내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날라가버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면례꾼들이 따라가보니 명정은 지금의 묘역에 떨어졌다.

지관을 불러 확인해보니 보기드문 명당이었다.

 

여러사람들과 숙의한 끝에 포은선생의 뜻으로 알고

그곳에 장례로 모시기로 하였다.

이야말로 포은선생의 넋이 점지한 명당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로 인하여 용인지역과는 직접적인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포은선생의 묘소를 용인에 모시게 된 것이다.

 

그후 그의 후손들이 묘막을 짓고 살기 시작한 이래로

오늘날 능원리는 연일정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혜원 신윤복 독서여가

https://youtu.be/q6rHQ6P1Sj8?list=RDC0Lpf9i4yg4&t=5

https://youtu.be/KixoWBU6DTg?list=PL54l0yIbIkWTbLFtFFuWFlBMjBqQF7oUK&t=3

https://raonyss.tistory.com/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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