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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2층 장관실에 尹집무실…맞은편에 경호처 - munhwa.com
태조 3년,
태조는 재상들에게
새 도읍지를 천거해 보라고 일렀다.
성석린은
부소를 천거하고,
정총은
개성을 주장했으며,
하륜은
무악을 주장하고,
정도전은
무악을 반대하는 등
「백 사람이 백 가지 주장을 하는」 난맥상이 벌어졌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王師인 무학이었다.
무학은
처음 오늘날의 왕십리 부근을 도읍지로 점지했으나
그곳 땅속에서 도선이 묻어 두었다는
「往十里」
(왕십리: 여기서 10리를 더 나가라) 팻말이 나오자
500년 후를 꿰뚫어본
도선의 혜안에 새삼 감탄했다고 한다.
무학의 주장에 따라 도읍지는 한양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한양에서 궁궐의 배치와 都城(도성)의 구상이 또 문제였다.
이 문제를 놓고
다시
신하들 간에 격론이 일어났다.
무학대사는
인왕산 아래를 주장했고,
정도전은
북악산 아래를 주장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경복궁이 건립됐다.
이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은
그 이후의 조선왕조史가 잘 설명해 준다.
오늘날의 청와대도
이때의 잘못된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궁궐을 짓고 새 도시를 건설하면서
한양의 風水지리학적인 결함이 지적되었고,
그러한
결함을 보완하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한양 궁궐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관악산이 火山이기 때문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궁궐 앞에
해태 같은
물짐승을 앉혀 놓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처럼
명당자리를 활용하면서
땅이 지닌 나쁜 점을 보완하여
全국토를 불국토로 만들자는 것이
도선국사의 비보사탑론이고,
이를 이어받은 것이
裨補風水(비보풍수)이다.
무학은
도선의 비보풍수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709100073
仁,義,禮,智 4(四) 가지가 없는 사람은
사가지(之) 없는 놈,
즉,
싸가지 없는 놈이 됩니다.
"싸가지가 없다" 라는 말의 유래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