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주 주도 새크라멘토(Sacramento) 인근 강에서
1848년 1월 금덩어리가 발견됨을 시작으로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
그해에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등지에서 왔다.
미국 동부에서는 교통사정으로 다음해(1849년)에 몰려왔다.
이때 온 사람이 무척 많아 49년에 온 사람들을
49er(포티나이너)라고 했다.
지금도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 풋볼팀 이름 등으로 쓰인다.
당시에 동부에서 캘리포니아로 오려면,
세가지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첫번째,
뉴욕에서 배를 타고
남미대륙 끝 Cape Horn을 돌아서 샌프란시스코로 오는길.
두번째,
뉴욕에서 배로 파나마 지협까지 와서,
카누와 나귀를 타며 1주일 여정의 지협횡단을 한 다음
태평양 해안에서 배를 기다려,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길.
세번째,
마차를 타고 육로로 오는 길로
반드시
봄에 출발해서 눈 내리기 전 가을에 도착해야한다.
어느 길을 택하든 4~6개월이 걸리고,
배의 난파,
열대병,
해적의 습격,
식수나 식량의 모자람 등으로
생명의 위험이 따른다.
골드러시로 인해
캘리포니아 인구는 급격히 불어나
1850년에 31번째 주로 승격되었는데도,
교통이 불편하여
동부와는 교류가 힘들고 개발도 더디었다.
비행기나 자동차가 없던 시대라,
유일한 현대적 교통수단인
철도건설에 정부에서도 고심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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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유다(Theodore Judah)라는
젊은 토목기사는 ‘미친 유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미쳐 있는 것은
미국 동안과 서안을 있는 대륙횡단철도였다.
유다는
남북전쟁이 막 시작된 1861년
캘리포니아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험준한 봉우리를 탐사하고
열차가 지나갈 경로를 찾아냈다.
그는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상원·하원 의원들을 찾아다니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설계도를 들이 밀었다.
전쟁이 끝나면
미국을 통합할 수단이
대륙횡단철도라는 사실은 링컨도 잘 알고 있었다.
링컨은
유다의 제안을 받아들여 1862년 철도법에 서명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이 시작된다.
미국은
당시 캘리포니아를 손에 넣었지만,
동과 서를 연결하는 교통망이 없었다.
마차를 타고 황무지를 지나갈 경우,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인디언의 공격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바다로 가는 길도 험난했다.
남아메리카 마젤란 해협의
거센 풍랑을 헤치며 멀리 돌아야 했고,
말라리아 위협을 감수하고
파나미 지협의 열대우림을 지나야 했다.
두 회사가 도전에 나섰다.
유다가 설립한 센트럴퍼시픽(Central Pacific)과
동부에서 출발할 유니언퍼시픽(Union Pacific)이었다.
센트럴퍼시픽은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출발,
서쪽으로 철도 공사를 하고,
유니언퍼시픽은
동에서 서로 공사를 해서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것으로 약속이
연방정부와 약속이 되었다.
완성된 구간에 대해서는 정부 보조금이 주어졌다.
하지만 난이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평탄한 선로는 1마일당 1만6,000달러,
경사진 땅은 마일당 3만2,000달러,
산맥을 통과하는 땅은 마일당 4만8,000달러였다.
게다가 선로를 1마일 공사할 때
철도연변에 25㎢의 땅을 주는 조건이 더해졌다.
이 조건은 후에 52㎢로 불어났다.
철도가 건설되면
인근 땅은 요즘 용어로 역쇄권이 형성된다.
도시가 들어서고 공장과 상가가 세워진다.
당연히 땅값이 올라간다.
이런 수지맞은 장사를 투기자본이 놓칠리 없었다.
동쪽과 서쪽에서 시작해
선로 공사가 얼마나 나가느냐에 따라,
공사비와 그 주변의 땅이 주어진다.
공사장 인근 도시에는 환락가가 만들어졌다.
인부들은
공사판에서 번 돈을 가지고 술을 마시고
여자를 구하고 도박을 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무법지대 장면이 공사장 곳곳에서 나타났다.
공사장을 상대로 하는 장사꾼들은
유니언퍼시픽이 불하받은 구역내에 들어와 사업을 했다.
분노했다.
그들은
불법으로 토지를 점거해
술집을 만들고 도박장을 차렸다.
닷지 장군은
분노해 케이스먼트 형제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케이스먼트 형제는
인부 200명을 중무장시키고
유흥가로 달려가 “마음껏 쏘라”고 명령했다.
이 전투에서 30명의 인부가 죽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순직으로 처리되었다.
동부의 공사는 구인난에 시달렸다.
인부를 채용하면 달아났다.
공사구간이 험난하기도 했지만,
인근에
철도공사판보다
더 많은 봉급을 주고 처우가 좋은 광산이 많았다.
힘들게 2,000명의 인부를 구해 공사장에 투입하면,
곧 1,900명이 달아났다.
드디어 동부의 센트럴은
중국인 인부를 인부로 쓰기로 했다.
1948~49년 골드러시 때 건너온 중국인 인부들이
캘리포니아엔 5만명 정도 살고 있었다.
처음엔 경영진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다.
백인들은
중국인을 비속한 인종으로 취급하고 있었고,
작업을 게을리 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도 워낙에 인력난이 심하다보니
중국인 50명만 써보기로 했다.
웬걸,
그들은 일을 너무나 잘했다.
아무런 군소리도 없이 힘들고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센트럴 경영진들은 중국인들을 더 많이 고용하기로 했다.
힘들고 어려운 작업은 중국인에게 맡겼다.
캘리포니아에서 네바다로 넘어가는 산맥에는
깎아진 절벽에 다리공사도 많았고,
숱하게 터널을 뚫어야 했다.
중국인 인부들은
중국식 바구니를 타고
절벽에 붙어 돌을 깨고 구멍을 냈다.
이젠 위험이 노출된 공사는 중국인에게 맡겨졌다.
숱한 중국인이 절벽에서 목숨을 잃었다.
알프레드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그 무렵 도입되었다.
니트로글리세린이란 폭약은 다루기가 위험했는데,
그 일을 중국인에게 맡겼다.
너희들은
죽어도 좋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터널작업을 하던중에 사고가 났다.
아무리
순종적인 중국인이라 하더라도
폭약에 손을 대지 않았다.
혹한이 다가왔다.
시레라네바다 산맥의 겨울은 매서웠다.
따듯한 푸젠(福建)성 출신이 대대수였던 중국인들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그들이 얼마나 얼어 죽었는지 자료도 없다.
소모품이었으니까.
10톤의 중국인 유해가
배에 실려 중국에 보내졌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쿠리(coolie)라는 비속어로 불리웠다.
(나중에
센트럴퍼시픽의 스탠포드는 공사가 끝난후
중국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샌프란시스코에 거주지로 차이나타운을 기부하고,
스탠포드대학을 설립해 일정비율의 중국인의 입학을 허용했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8
http://whytimes.kr/news/view.php?idx=12875
https://www.posri.re.kr/ko/board/content/12359
https://m.blog.naver.com/kr_blog/222064874259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17120192731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basicity&logNo=120010894894
http://www.atlasnews.co.kr/news/curationView.html?idxno=2351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25/2019062500397.html
https://brunch.co.kr/@jyhan71/138
https://brunch.co.kr/@jyhan71/139
https://brunch.co.kr/@jyhan71/140
https://brunch.co.kr/@jyhan71/141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5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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