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직후에도
도선의 예언서는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태종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 때도 도선이 이용되었다.
당시 천도 문제를 실질적으로 담당한 이는
술관 이양달(李陽達)과 정승 하륜(河崙) 등이었다.
하륜은 ‘도선비기’를 존중해
“한수가 명당으로 들어온다는 말”(漢水入明堂之語)에 주목했다.
한편 이양달은
‘도선비기’에 “서쪽에 공암 있고 붉은 색깔로 글씨 쓴 돌 벽이 있다.”는
구절에 암시를 받아 인왕산에서 붉은 글씨를 찾았고,
결국 경복궁터를 정하게 되었다.
(‘필원잡기’, 권 2)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다는 도선이
이제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일어선 조선왕조의
안정과 발전을 보장해 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5) 한국 최고의 예언가 도선과 정감록 | 서울신문 (seoul.co.kr)
서울의 비보풍수(碑俌風水) ^ 도선비기(秘記) (tistory.com)
https://www.youtube.com/watch?v=I1YpDtsxEwU&t=340s
이곳은 정씨의 도읍지니라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https://www.youtube.com/watch?v=PJGwlDhy2VE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qazxcw63&logNo=221326794509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면서 개성으로부터 천도하기로 결정한 다음
한양성의 위치를 잡을 때
정도전과 무학대사 등 두 사람으로부터 의견을 수렵했다.
이때
무악대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북악산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하여
왕궁의 정위치를 잡아야 장차 닥쳐올 환난을 막을 수 있을 것이 옵니다”
그러나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다.
“북악을 주산으로 삼고 남산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로 삼아
남쪽을 향해 궁궐을 앉혀야 할 것이옵니다.
궁궐을 동쪽을 향해서 지은 전례는 없사옵니다.”
타락한 고려 귀족 불교의 타파를 명분으로 내걸고
숭유억불을 표방했던 이성계는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의견을
승려였던 무학대사의 말보다 더 중요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도전에게 밀리게 된 무학대사는 한양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내 말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200년 뒤에 반드시 후회하는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신라의 도선대사가 쓴 비기(秘記)에
“국도(國都)를 정할 때
중의 말을 들으면 나라의 기초가 연장되나
정승의 말을 따르면
5세(世)가 되지 못하여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난리가 일어나
백성들이 크게 다치게 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무학대사는 비기를 근거로 들어
200년 후 환난설을 거론한 것 같다.
무학의 도참비기에 근거한 주장을 무시함으로써
과연 조선은
5세만에 세조에 의한 왕위 찬탈이 생기고,
200년이 경과했을 즈음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다.
또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외척의 세도가 드높았는데,
그것도
왕손을
상징하는 좌청룡 낙산보다
외척을 의미하는
우백호 인왕산을 더 중시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http://www.1ga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0789
https://www.youtube.com/watch?v=rudQezIScBw
https://youtu.be/uH-u_VkjSYc?list=RDCMUCjPqSbyqm5IZEoXu7I-KPag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hass3&logNo=220136773427
https://m.blog.naver.com/3058833/220831734001
白衣觀音無說說 南巡童子不聞聞 (백의관음무설설 남순동자불문문)
백의관음보살님은 말 없이 설법을 하시고, 남순 동자는 듣지 않아도 설법을 알아듣는구나.
甁上綠楊三際夏 巖前翠竹十方春 (병상녹양삼제하 암전취죽시방춘)
병에 꽂은 버드나무 푸른 가지는 언제나 여름인데, 바위 앞 푸른 대숲은 시방에 봄이로다.
- 『관음찬』
관세음보살을 찬탄하는 게송으로서 관음전 법당의 주련으로 걸려 있는 글이다.
선종(구산선문)의 주요 문파들은 중국선종과 마찬가지로
대개 모두 풍수지리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 선종도 마찬가지이다.
산과 하천, 분지, 철불과 비보사탑등이 그징표들이다.
역시 풍수지리에 밝았던 은사혜철의 문하에서 4년간 공부한 스님은
당시
‘무설설 무법법(無說說 無法法)’의 화두를 깨치고 인가받았다고 한다.
그뒤 광양 옥룡사를 창건하는 37세때까지
심산유곡과 저자거리를 돌며 운수행각을 벌인다.
그리고
37세 옥룡사를 창건한후 입적때인 898년 72세때까지
옥룡사를 벗어나지 않은채 후학양성에 몰두했다.
동리산문의 법맥을 이어 영암땅에 옥룡산문을 열어
제자들 수백명을 배출 독특한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에게 풍수지리는 대중교화의 방편이었다.
위대한 전법자들-도선국사 - 불교신문 (ibulgyo.com)
https://blog.daum.net/511-33/12370218
https://angrytest.tistory.com/119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22
풍수: 비보풍수1(한국의 풍수와 비보)
도선국사 호남인 정말 배제했나 < 가상인터뷰 < 이전 연재모음 < 지난연재 < 기사본문 - 법보신문 (beopbo.com)
옥룡자(玉龍子), 도선국사의 이야기:이법철의 논단 (bubchul.kr)
https://www.youtube.com/watch?v=-YxIgxDF7nc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gytlr52&logNo=220242112639
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04/2015030403388.html
https://blog.daum.net/windada11/8768657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search.html?dbGubun=SD&m201_id=10048516
http://oldagenews.bstorm.co.kr/news_view.jsp?ncd=4524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024
[누각]
불교 전래 초기의 사찰은
중문-탑-주불전-강당이 일직선 축 선상에 배치되는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찰의 형식은
선불교가 수입되어 사찰의 입지가 산간 경사지로 이동하면서 부터는
삼문-누각-탑-주불전으로 배치형식이 바뀌게 된다.
지 금까지는
산지사찰의 형식을 가지면서 누각이 강당의 기능을 대체하였다고 생각하였으나,
이번 연구를 통해서
누각이 단순히 강당의 기능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비보풍수의 수단으로 기능 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지금까 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른 이론이어서
향후 이러한 결과에 대 한 논의가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계담과 못]
계담과 못의 경우에는
산지 사찰에서 사찰 주변을 흐르는 계 류를 이용하는 수단으로써,
조사된 대상지 사찰 중 8개 사찰
(신륵사(강),
법주사, 부석사(샘),
쌍계사, 화엄사, 대흥사(계 담, 못),
해인사(못),
선암사(못))에서 볼 수 있는 비보의 방법 이었다.
비보 연못의 일반적인 기능은 지기를 머무르게 하는 것이며,
장풍적 조건 보완이 있다.
또한
득수 비보의 기능으로 빠져나가는 물의 유속을 누그러뜨리기도 한다.
지리산을 감싸고도는 섬진강 변에는
도선국사가 비보풍수를 깨친곳이 있다.
구례 마산면 사도리(沙圖里)이다.
모래그림
고을로 불리는 사도리에 관한 유래가
도선국사의 탑비인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에 전한다.
비문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지리산 암자에 머물 때였다.
하루는 수백 살 먹은 기인이 찾아와
“이것도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다”며
도선국사를 강가로 이끌었다.
그는 강의 모래를 끌어 모아 산천을 그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도선국사는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땅의 이치를 활연히 깨달았다.
이후 지역에서는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린 마을,
사도촌(沙圖村)이라 일컬었다.
도선국사가
모래그림을 보고 땅의 이치를 깨달은 곳은
마산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역으로 하사(下沙)마을 인근이다.
지금은
사도리 마을도 경지정리 사업으로 모래밭은 사라지고 없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079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lmy0142&logNo=220163831848
마을디자인 > 칼럼 > @풍수지리는 경험과학이다. 26; 한양과 비보풍수@ (villd.com)
https://m.cafe.daum.net/dlaandnd/Ia6V/461?
https://baronet.tistory.com/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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