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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香氣를 찾아서!

열하일기(熱河日記) ^ 燕巖(연암) 박지원(朴趾源) - 수레.馬車 ^ 道路(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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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燕巖(연암) 박지원(朴趾源) - 수레.馬車 ^ 道路(도로)

고구려는 수레의 나라라 불릴 정도로 많은 수레를 보유했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일상생활에 수레가 활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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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의 ‘열하’ 는 어떤 의미인가?

박지원은

팔촌형이자 영조의 사위인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행길에 올랐다.

 

연행길은

보통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도착하는 것이 정해진 루트. 그

러나 박지원 일행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황제는

내몽고 지역에 위치한 ‘열하’ 에 있었다.

 

열하는 청나라 황제들이 즐겨 찾던 휴양지.

때문에

사신단은 북경에서 약 230킬로미터 떨어진 ‘열하’ 까지 가게 됐다.

 

- 조선사신단은 왜 노숙을 해야 했나?

 

제1편의 여정은

고구려의 옛 땅인 단동에서 요하까지.

취재팀은

고구려 전문가인 우석대 조법종 교수와 함께 대장정 길에 올랐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 대륙에 들어와 첫날을 보낸 조선사신단.

그들은 천막을 짓고 노숙을 해야 했다.

 

청이 정한 ‘봉금지대’ 때문이다.

 

 

https://blog.daum.net/santaclausly/11793688

 

백두산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HD 역사스페셜] 백두산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1. 백두산정계비의 위치는(왜 간도인가?)? 나라 땅의 모든 산줄기가 비롯되는 곳. 백두산은 우리 영토 인식의 근원이다. 그리고 백두산 너머의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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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봉금지대를 제안,

구련성부터 국경관문소인 ‘책문’ 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취재진은 책문을 지나

‘봉황산’ 에 도착,

옛 고구려의 성을 확인했다.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박지원이 본 역사의 비극!

봉황산성을 떠난 취재진은

‘초하구’ 와 ‘연산관’ 등을 거치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뼈아픈 역사를 반추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허생전’ 에서

북벌의 무모함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청석령과 석문령.

조선사신들은

청석령 일대를 고구려의 고토로써 특별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현지에서는 지금까지도

고구려의 생활 방식인 ‘부경(창고의 하나)’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중원을 누빈 고구려의 기억

 

다음 행선지는 요동 벌판.

우리에게는 만주 벌판으로 더 익숙한 곳이다.

고구려는 한때 이 넓은 요동벌의 주인이었다.

 

취재팀은

중원을 누빈 고구려의 역사를 찾아가 봤다.

 

요동벌과 산봉우리들이 만나는 접점에는

고구려의 산성이 일렬로 줄지어 있다.

 

중원 세력들이 넘보지 못하게

1차 방어선으로 산성을 구축한 것이다.

 

요동벌심장부인 대도시 ‘요양’ 은

중국 대륙 동서남북을 잇는 요충지로,

고구려는 여기에 ‘요동성’을 세웠다.

 

요동성을 둘러보는 것은 조선 사신들의 연례행사였다.

 

- 청이 일어선 곳,

 

조선은 피눈물을 흘린 곳

‘심양’ 청태조 누르하치의 아들인 청태종 ‘홍타이지’ 는

병자호란 때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삼전도의 치욕을 안겨준 인물이다.

 

그는

심양에서 국호를 청으로 정하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다.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끌려와 8년간 억류당했던 곳도 심양이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있던 시기,

청은

이미 만리장성까지 진출했으나

조선은 숭명반청을 고집했다.

 

그 때문에

조선의 백성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심양 곳곳에 남아 있는 당시 조선의 애환을 취재했다.

 

https://youtu.be/oC-3Yh3t658

 

 

-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그곳,

요하 서쪽의 고구려성을 찾다

 

 

요하의 강줄기는

중국대륙을 요동과 요서로 나누는 기준.

2편은 요하 건너 서쪽의 북경으로 향한다.

 

취재팀은

사신길을 연구하는 건양대 이철성 교수와 여정을 함께했다.

 

중국학계는

고구려의 영토를 요동지역에 한정시켜 왔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요하 서쪽에 10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취재진은

요하 서쪽에 있는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고구려는 물론

옛 고조선의 영역으로 추정할 수 있었던 요서 지역의 유적.

한때 이곳을 장악했던 우리의 역사를 확인한다.

 

- 명· 청 교체의 현장에 가다

 

다음으로 취재진이 간 곳은

명· 청 교체의 역사적 현장!

명· 청의 운명을 가르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금주· 송산· 행산· 탑산.

 

당시 조선군도

청에 조총부대를 파병하며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 당시 청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후에 효종)도 종군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이 요구한 파병을 거절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명은 어떻게 멸망하게 된 것인지,

역사적 현장에서 되짚어본다.

 

- ‘피서 산장’을 짓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박지원 일행은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황제가 있는 내몽고 지역으로 강행군했다.

 

만리장성 밖 내몽고 지역에

피서 산장을 지은 사람은 청나라 4대 황제인 강희제.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황제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만리장성보다

열하에 짓는 피서산장에 관심이 많았다.

 

강희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역시

피서산장을 더 크고 화려하게 짓고 기능도 강화시켰다.

 

청나라는

몽고와 티베트 등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피서산장을 건설한 것이다.

 

박지원을 열하에 오게 한 것도

건륭제.

피서산장을 열하에 조성한 이유,

박지원은 열하에 와서 단숨에 깨닫는다!

 

- 박지원의 문화충격,선진문화의 통로를 열다

 

박지원은 열하에 갔다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두 달간 머문다.

 

이곳에서 박지원은

청의 선진문물,

특히

수레와 배에 관심을 갖는다.

 

나아가

박지원을 비롯한 연행단은

새로운 과학 기술 문명에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

그는 연행을 통한 경험은

‘연행록’으로 남아

청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청 문화를 전파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이다.

 

https://youtu.be/HLJ3y9x_sw8

 

 

https://www.chungnam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6184 

 

[우리가 잘 모르는 연암과 다산 이야기] ㉛ 수레를 바라보는 연암과 다산의 시선 - 충남일보

“경상도 아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강원도 사람들은 산사나무 열매(아가위)를 절여 장을 대신한다. 평안도 사람들은 감과 감귤의 맛을 분간하지 못하고,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나 정어리를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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