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고향 가라골(佳村)

仁同郡의 역사 - 칠곡(漆谷)은 어디? - 박정희 ^ 장택상

 

구미시 ^ 2021현재(舊인동면~거의.옥계.양호.구포.금전.황상.인의.구평.신동.임수.진평.시미)
舊북면-양포동, 舊읍내면-인동동

 

칠곡군 행정구역 변천사 

 

칠곡군(漆谷郡, 1895) , 인동군(仁同郡, 1895) → 칠곡군(1914)

 

구한말(1895) 칠곡군과 인동군의 영역

 

1914년 ; 부군면 통폐합 이후 인동군을 병합한 칠곡군의 영역

 

인동(仁同)은

경상북도 구미시(龜尾市)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신라 초에는 사동화현(斯同火縣)‧이동혜현(爾同兮縣)이라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수동현(壽同縣)으로 고쳤다.

 

경덕왕 때 다시 인동현(仁同縣)으로 고치고 별호를 옥산(玉山)이라 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상주목(尙州牧) 경산도호부(京山都護府: 星州)의 속현(屬縣)으로 병합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감무(監務)를 두고

약목현(若木縣)을 속현으로 하였다.

 

1413년(태종)에 인동현에 현감(縣監)을 두었다가,

1604년(선조 37)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인동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 인동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군이 폐지되었고

일부 지역은 인동면이 되었다.

 

http://gumi.grandculture.net/gumi/toc/GC01200681

 

역사 - 디지털구미문화대전

[정의]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경상북도 구미시의 역사. [개설] 구미 지역은 전근대 사회에서는 선산과 인동이 중요한 행정구역이었다. 선산은 삼국시대부터 일선, 숭선, 선주로 불리다가 1413년(태

gumi.grandculture.net

 

인동(仁同)은

757년(경덕왕 16) 이전에는

사동화현 또는 이동화혜(爾同火兮)라고 불렸는데,

757년 수동현(壽同縣)[별호는 옥산(玉山)]으로 바꾸고

성산군(星山郡)[지금의 성주군]에 소속되었다.

 

940년 주·군·현 개편 때

인동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018년(현종 9)

경산부(京山府)[지금의 성주군]의 속현이 되어

오랫동안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채

경산부의 간접 지배하에 있었다.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경산부에서 분리 독립되면서 감무가 파견되고 약목현을 영속시켰다.

 

1413년(태종 13) 전국의 감무를 혁파할 때

인동현으로 개칭하면서 현감이 파견되었다.

 

1601년(선조 34) 찰리사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가

천생산성을 보수하여 관방의 요새로 부각됨에 따라,

1604년(선조 37)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에 의해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조방장(助防將)을 설치하고 부사(府使)가 겸임하였다.

 

1895년(고종 32)

전국이 23부제로 개편되자 인동 도호부는

그 속현인 약목현과 통합하여

인동군으로 되어 대구부에 소속되었다.

 

인동군은

읍내면·

북면·

동면·

장곡면·

문량면·

석적면·

북삼면·

약목면·

기산면 등

9개 면을 관할하였다.

 

1896년

지방 행정 체제를 다시 개정하여 13도 7부제가 실시되자

인동군은 경상북도에 소속되었다.

 

1911년 인동군청을 약목면으로 옮겼다.

 

1914년 3월 1일

일제의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인동군을 폐지하여 칠곡군에 편입시키고,

같은 해 4월 1일

읍내면과 북면을 합쳐

인동면(仁同面)으로 개편하였다.

 

인동군 동면 지역은 칠곡군 가산면으로,

인동면 장곡면과 문량면은 칠곡군 석적면으로 편입되었다.

 

1978년 2월 15일에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합쳐

구미시가 탄생하였다.

 

1983년 2월 15일에

인동(仁同)의 인의동(仁義洞), 황상동(黃桑洞), 구평동(九坪洞)을 합쳐서

인동동(仁同洞)이 되었다.

인동현 - 디지털칠곡문화대전 (grandculture.net)

 

인동현 - 디지털칠곡문화대전

[정의]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칠곡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제도. [개설] 인동현(仁同縣)은 940년(고려 태조 23) 주군현 개편 때 수동현(壽同縣)을 인동현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생겨났다.

chilgok.grandculture.net

 

 1604년(선조 37)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선조 때

곽재우(郭再祐)가 축조했다는

천생산성(天生山城)의 조방장을 도호부사가 겸임하였다.

 

1895년(고종 32) 대구부 소관의 인동군이 되었고,

다음해에 경상북도의 군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칠곡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선산과 칠곡 사이의 작은 현에 불과하던 인동이

도호부라는 높은 품계를 받은 것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가 왜적을 크게 무찔렀기 때문이다.

 

지형상 금오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건대산(件代山)ㆍ

옥산(玉山)ㆍ

천생산(天生山)ㆍ

유악산(流嶽山)ㆍ

황학산(黃鶴山) 등에 이어지면서 인동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인동의 중앙부를 낙동강이 관류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건대산과 박집산(朴執山)에 봉수가 있어

성주와 상주 지역을 연결하였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861

 

인동(仁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래 신라의 사동화현(斯同火縣)이었는데 뒤에 수동(壽同)으로 고쳤다가, 757년(경덕왕 16) 인동이라 고쳐 강주(康州) 소관의 성산군(星山郡)주 01) 영현으로 하였다. 1018년(현종 9) 경산부(京山府)

encykorea.aks.ac.kr

 

칠곡군에 가려고

중앙고속도로 칠곡IC에 내렸는데

칠곡군이 아니라 대구광역시 북구이고,

칠곡군청에 가려면

경부선 왜관역이나 왜관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야 하며,

칠곡초등학교와 칠곡중학교는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다. 

 

대구 사람들은

칠곡군에 갈 때 '왜관 간다.' 고 하지,

'칠곡 간다.' 고 안 한다.

 

대구에서 '칠곡 간다.' 는 말은

팔달, 팔거,학정동 방면으로 간다는 의미이다.

 

군청소재지인 '왜관'의 지명 유래는

이곳에 일본 사신이 묵던 倭館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s://namu.wiki/w/%EC%9D%B8%EB%8F%99

왜관

경북 칠곡군의 군청소재지가

일제강점기 이래로 칠곡읍이 아닌 왜관읍이다.

 

옛 칠곡읍은

현재의 대구광역시 북구의 금호강 이북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

 

옛 칠곡읍은

구한말까지 칠곡군의 중심지였으나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동군과 칠곡군을 통합하면서 군청을 왜관읍으로 이전했다.

 

결국 옛 칠곡읍은

1981년 대구시가 대구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대구로 편입됐다.

 

따라서

원래의 ‘칠곡(대구 칠곡)’과

현재의 ‘칠곡군’은 애매모호한 관계가 돼 버렸다.

http://www.hj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33 

 

‘대구 칠곡<柒谷→漆谷>, 경북 칠곡<漆谷>’ 아직 끝나지 않은 논란 - 홍주일보

광복 70돌을 맞는 올해, 일제 강점기 때의 창씨개명한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 국토의 지명에는 일제강점기 ‘창지개명(創地改名)’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가운데 이를 바로

www.hjn24.com

 

 

증산도와 한민족의 사명 :: 한국의 성씨 / 인동仁同(옥산玉山) 장씨張氏 (tistory.com)

 

한국의 성씨 / 인동仁同(옥산玉山) 장씨張氏

한국의 성씨 / 인동仁同(옥산玉山) 장씨張氏 우리나라 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jsdmessage.tistory.com

 

인동장씨(仁同張氏) (daum.net)

 

인동장씨(仁同張氏)

인동장씨(仁同張氏) 고려 신호위상장군 장금용이 시조… 칠곡 인동서 뿌리내려 인동장씨(仁同張氏)는 지금의 칠곡지역의 인동을 관향으로 삼고 있는 씨족이다. 인동은 예전에 옥산으로 불렸기

blog.daum.net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8554 

 

인동장씨 남산파 종택…조선 초 장안세 선생 때부터 문호 신장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모원당에는 이같은 구절의 시가 있다. 상촌 신흠의 "동천년노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 월도천휴여본질 유경백별우신지"의 일부다. "오동나무는...

www.kyongbuk.co.kr

 

동락서원(구미대교 부근)

 

http://www.traveli.co.kr/read/contentsView/2366/0/0/1

 

인동에 숨어있는 유교문화의 흔적,경상북도 구미시,문화,여행기사,트래블아이

인동이라는 지명이 있다. 현재는 구미시에 있는 인의동, 임수동, 진평동, 구평동 등을 아울러서 부르는 곳이지만, 선조가 다스릴 때는 도호부가 위치하고 고종 때는 인동군이라는 지명으로 불릴

www.traveli.co.kr

 

[서원] 30. 구미 동락서원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 (kyongbuk.co.kr)

 

[서원] 30. 구미 동락서원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

동락서원은 인조(仁祖) 때 산림(山林)으로 이름이 높았던 여헌(旅軒) 장현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55년(효종 6) 제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1601년(선조 34)에 장현광이 지은 부지암정사

www.kyongbuk.co.kr

 

박정희와 장택상 두 생가는

경부선 철길 하나 사이로 부르면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의 이웃마을이다.

 

해방 무렵까지만 해도 장택상 전 총리 집안은

영남 제일의 대부호 만석꾼으로

고향 일대에서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

 

금오산

박정희 아버지 박성빈은

처가의 위토만으로 도저히 생활이 안 돼

장 직각(장택상 아버지 벼슬이름)댁 땅

다섯 마지기를 소작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소년 박정희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둘째 무희 형이 지게에다 도지(賭地, 논밭을 빌린 삯)와

마름에게 줄 뇌물 씨암탉을 지고

장 직각 댁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자랐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어릴 때 제대로 먹지고 못해

체구도 작은 소작인의 막내아들은

국가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곧 대통령이 됐다. 

 

장택상씨가 볼 때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놀랄 일이었다.

 

마름의 아들도 아닌,

대면조차 하지 않았던 천한 소작인 아들이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던 이 나라 대통령이 됐다니.

 

박정희 생가

 

그래서

장택상 씨는 5.16 쿠데타 이후 

군정연장반대투위 고문,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의장 등

반(反) 박정희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당시의 '박정희 의장'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공식 칭호를 붙이지 않았다. 

 

'박정희씨'

'박정희군'이라고 낮춰 부르며 당신 특유의 독설을 늘어놨다.

이 말을 전해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세상이 변한 줄도 모른 채,

아직도 자신을 소작의 아들로 여기면서 깔본다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23614 

 

'박정희군'이라 부르던 장택상, 둘의 기묘한 인연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22)]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⑦

www.ohmynews.com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arira6&logNo=110029868884 

 

대구 거부실록-장길상(張吉相)家

장길상가는 오늘날 구미시 오태동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이 곳은 인동(혹은 옥산)장씨 남산파의 일부가 세거...

blog.naver.com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6986/5

 

평양 명기(名妓) 강명화 정사(情死) 사건

1923년 6월7일, 강명화는 아침 일찍 양사동 집을 나와 대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인력거에 올랐다. 아침부터 서두른 탓인지 눈 주위가 조금 부어 있었지만 백짓장같이 창백한 얼굴…

shindonga.donga.com

 

[대구 추억기행 .16] 기생이야기<6>-강명화 (yeongnam.com)

 

[대구 추억기행 .16] 기생이야기<6>-강명화

1923년 6월11일 오후 6시 온양온천여관 마당. 객실에서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순간 대구 대부호 장길상(張吉相)의 장남 장병천(張炳天)이 자기가 투숙한 방으로 쏜살같이..

www.yeongnam.com

 

천하절색 강명화와 갑부 아들 장병천의 슬픈 사랑ㅣ썸랩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천하절색 강명화와 갑부 아들 장병천의 슬픈 사랑ㅣ썸랩

[BY 네이버 연애결혼] 그시절 그연애 경성 최고의 스캔들 1920년 7월 5일 경성 종로 관수동의 요릿집 금...

m.post.naver.com

 

https://youtu.be/J4Fndvs7KS4

 

https://youtu.be/P2CRbanpeRA